[담담하게 표현한 죽음]
<8월의 크리스마스>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총각 ‘정원’과 불법 주차단속원 ‘다리미’의 사랑을 그린 1998년 개봉한 로맨스 영화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삶의 끝, 죽음에 대한 정원의 담담함이 배어 있다.
무더운 여름, 장례식장을 찾아 맥없는 정원의 사진관을 찾은 다리미. 그들은 이렇게 해서 처음 만난다.
다림이는 불법 주차단속원으로 필름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뽑기 위해 초원사진관을 자주 찾게 된다.
사진관을 찾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다림은 정원에서 사랑의 감정을 느꼈고, 이는 정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원과 다리의 사랑은 둘 다 있지만 삶의 끝에 다가온 정원은 다리미에 대한 사랑을 마음껏 표현하지 못한다.
퇴원 후 자신을 기다리던 다리의 편지를 확인하고 일자리를 찾지만 그저 멀리서 바라볼 뿐이다.
어쩌면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변명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인생과의 이별, 늙은 아버지와의 이별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다.
그래서 그는 남은 다리가 아프지 않도록 스스로 악역을 자청했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허진호 감독의 첫 작품인데, 한국의 웰메이드 멜로 로맨스 영화로 꼽힌다.
허진호 감독은 절제된 화법을 사용했음에도 비언어적으로 감정을 잘 표현했다.
영화 후반부에서 정원은 다림이 남긴 편지를 읽지만 내레이션에서도 화면에서도 그 내용을 밝히지 않는다.
편지를 묵묵히 읽어 내려가는 정원의 모습만 비칠 뿐이다.
극중 정원은 한 번도 다림에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지 않았다.
다리미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자신의 아픔을 공유하지 않았다.
친한 친구조차 “철구야, 나 죽는다!
” “마시고 죽자!
”라고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을 뿐이었다.
정원은 죽음의 공포를 혼자 이겨냈다.
영화평론가 안승범은 “‘죽음’은 예기치 못한 파국으로 치닫는 극적인 소재가 아니다.
영화는 오래전부터 죽음과 동행해온 남자가 사랑의 감정을 다룬 태도를 보여 준다고 말했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는 죽음을 담담하게 표현하지만 절제된 화법이 이를 더욱 안타깝게 한다.
가족사진을 찍으러 왔다가 촬영 후 늙은 어머니에게 혼자 찍기를 권하는 아들. 늦은 밤 다시 사진관을 찾은 할머니는 제단에 오를 사진이라며 정원에게 재촬영을 요구한다.
언어화되지는 않았지만 영정사진에 대한 요청과 승낙이 순간적으로 이뤄진다.
할머니는 이를 받아들인다.
마당이 쓰러져 병원에 입원한 이후 불이 꺼진 초원의 사진관에 낙엽이 떨어져 정원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영화 초반, 아버지와 생선을 사러 간 정원은 어항을 보고 있다.
한편, 아버지는 조금 전까지 살아 있었지만, 손질되고 있는 물고기를 바라보고 있다.
칼부림 소리에 마당도 외면하고 잠시 그 장면을 보다가 이내 어항을 바라본다.
대사가 없는 장면이지만 허진호 감독은 죽어가는 아들과 아들을 떠나보내는 아버지의 감정을 살아있는 물고기와 죽은 물고기의 미장센적인 배치와 인물의 시선, 그리고 카메라의 감각적인 움직임과 소리를 이용한 편집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했다.
또 이 영화에서 운동장은 매우 중요한 의미로 쓰인다.
운동장은 정원의 상태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영화에 나타나지만 정원의 죽음 이후로는 눈 덮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영화 초반 내레이션에서 정원은 텅 빈 운동장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 사라질 줄 알았다고 말한다.
이처럼 영화에서 운동장은 정원의 심리를 그리는 도구로 쓰인다.
정원과 다림이가 놀이공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정원이 너에서의 귀신 이야기를 타림에게 들려주지만 겁에 질린 다림은 정원을 팔짱 낀다.
순간 마당은 말을 멈춘다.
이때 정확한 타이밍에 음악이 흐른다.
음악이 나오는 순간, 관객은 설레이면서도 뿌듯해진다.
음악은 이런 관객의 감정을 만들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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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다림의 입장에서는 전혀 다르다.
정원이 처한 상황을 아는 시청자와 달리 영화 속 다림은 정원의 상황을 모른 채 마냥 기다리는 인물이다.
다리미는 계속해서 마당으로 다가가야 한다.
술을 사달라고 말하고 사진관에 가서 놀이공원에 가자는 이야기를 한다.
어느 정도 서로의 감정을 확인했다고 생각되면 마당은 연락이 두절되고 사진관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다림의 입장에선 이유 없이 멀어진 것이다.
다리미는 아직 마당을 기다리지만, 마당은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른 후 정원의 아버지에 의해 정원의 첫사랑 사진이 있던 자리에 다림이의 사진이 걸려진다.
자신의 사진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웃고 돌아보는 다리의 모습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정원의 마음을 정확히 표현한 사진은 영화 사진 한 장뿐이었다.
다림이의 입장에서는 길고 답답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영화평론가 안승범은 “그녀의 이름은 김다림이 아니라 ‘기다리다’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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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때 애들이 다 가버린 텅 빈 운동장에 남아주길 바랬다.
그곳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아버지도 나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로 시작한 정원의 내레이션이 영화 중반부에서는 세월은 많은 것을 바꾼다.
어색하게 한마디씩 나누며 헤어지면서 지원이는 자신의 사진을 내게 지워달라고 부탁했다.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끝난다로 진행됐고 후반부에는 내 기억 속의 무수한 사진처럼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끝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된 당신에게 감사의 말을 남깁니다로 끝을 맺는다.
언제 올지 모르는 끝을 눈앞에 둔 마당에 사진은 남겨두고 싶은 현재의 파편일 것이다.
(1) 안승범, [안승범의 시네마클리티크] 그 죽음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 <8월의 크리스마스>, 2018 (2) 안승범, [안승범의 씨네마클리티크] 그 죽음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 <8월의 크리스마스>, 2018(3) 류훈, 영화 시나리오 스토리텔링 – 장편상업영화를 중심으로 – ,